1. 원작에서 영화까지: 30년의 여정
2025년 9월 24일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 는 1997년 출간된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The Ax』 를 원작으로 한다. 2005년 코스타-가브라스의 〈Le Couperet〉 에 이어 두 번째 영화화 작품이다.

원작은 미국 기업 합병과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직장을 잃은 중년 관리자 버크 드보어가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를 차례로 ‘제거’하는 과정을 그린다. 날카로운 내면 독백과 블랙 유머로 9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풍자했다.
반면, 박찬욱의 영화는 같은 제지 산업을 배경으로 하되, 한국 중산층 가장 ‘유만수’(이병헌)의 시선에서 가족과 체면을 지키려는 절박한 사투를 블랙 코미디로 풀어낸다.
2. 테마의 전환: 개인의 냉소 → 가족의 압박
- 원작/프랑스판: “개인 vs. 시스템” 구도. 버크는 실업을 개인적 실패로 받아들이며, 자아실현의 왜곡된 방식으로 살인을 정당화한다. 가족은 주변부에 머문다.
- 한국판: “가족 vs. 시스템”으로 전환. 만수의 선택은 아내와 자녀를 위한 ‘필연적 희생’으로 포장된다. 가족이 내러티브 중심에 들어서면서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책임감과 중산층 불안이 강조된다.
원작의 핵심: 웨스트레이크의 ‘액스’는 미국 개인주의를 반영한 내면 중심 서사다. 주인공 버틀러의 실업은 개인적 실패로 인식되며, 그의 ‘사냥’은 자아실현의 왜곡된 형태로 그려진다. 테마는 “현대 자본주의가 개인을 어떻게 파괴하는가”에 초점, 유머는 주인공의 냉소적 독백에서 나온다. 이는 1990년대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 붕괴를 비판하지만, 가족보다는 개인의 고립된 절망을 강조한다.
영화의 변형: 박찬욱은 이를 한국의 ‘가장’ 문화로 재해석, 테마를 “시스템 속 가족 보호 본능의 타락”으로 확장한다. 주인공 유만수(이병헌)의 행동은 더 이상 개인 복수가 아닌, 아내와 자녀를 위한 ‘필연적 선택’으로 포장된다. 이는 원작의 추상적 비판을 구체적 사회 풍자로 승화시키지만, 동시에 깊이를 잃는다 – 원작의 철학적 냉소가 영화에서는 블랙 코미디의 ‘웃음’으로 희석되어,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적 딜레마’로 축소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IMF 외환위기나 최근 고용 불안정을 연상시키며 한국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지만(예: 면접 굴욕 장면), 원작의 보편적 통찰을 넘어선 ‘로컬라이제이션’이 과도해 보인다.
평가: 한국 관객의 공감을 얻지만, 원작의 철학적 냉소와 보편적 자본주의 비판은 희석된다.
3. 서사의 변화: 독백의 긴장 → 다중 시점의 감정
- 원작: 1인칭 시점. 버크의 치밀한 계획과 내적 타락이 점진적 긴장감을 쌓는다.
- 영화: 다중 시점. 아내 미리(손예진), 자녀의 시각까지 삽입되며 가족극의 성격이 짙어진다. 서사는 동적이지만 긴장감은 분산된다.
평가: 한국 드라마적 요소가 풍부해졌지만, 블랙 코미디 톤이 살인을 코믹하게 처리하면서 관객 일부는 “웃어도 되나?”라는 불편을 토로한다.
4. 캐릭터 재해석: 냉정한 개인 → 흔들리는 가장
- 버크(원작): 냉철한 계산가. 가족은 동기부여 이상의 의미가 없다.
- 만수(영화): 체면과 책임감에 짓눌린 전형적 가장. 가족 사랑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 미리(신설 캐릭터): 만수의 아내로, 원작에는 없는 인물. 가족 구원의 촉매로 그려지지만, 여성 캐릭터가 ‘희생적 어머니’로 고정화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5. 한국형 현지화의 빛
- 시대성: IMF 위기 이후 상시적 고용불안, 집값과 교육 문제를 서사에 적극 반영.
- 스타 캐스팅: 이병헌·손예진·차승원·박희순 등 화려한 배우진의 열연.
- 블랙 코미디의 사회 풍자: 면접 굴욕 장면, 재취업 경쟁의 살벌함은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씁쓸함을 남긴다.
6. 한국 정서와의 충돌: 현실성 결여와 불편함
- CCTV 사회와 범죄의 비현실성: 한국은 2022년 기준 CCTV 1,960만 대 이상. 이런 환경에서 어설프게 살인을 시도 한다는 설정은 관객들의 몰입감을 방해한다.
- 폭력의 희화화: “가족을 위해 범죄”라는 정당화가 과도한 유머와 결합되며, 면접 보려고 살인을 저지른다는 설정 자체가 일부 관객에게 윤리적 불편함을 남겼다.
7. 결정적 차이: ‘인간 vs. 인간’ → ‘인간 vs. 시스템’
원작과 프랑스판은 같은 인간 노동자들 간의 잔혹한 경쟁에 집중했다. 박찬욱의 한국판은 한 발 더 나아가, AI·알고리즘이라는 비인간적 경쟁자를 암시한다. 이는 2025년 노동시장의 불안을 예리하게 짚은 현대적 변주다. 다만 영화 안에서 구체적 묘사가 부족해 상징적 제시에 그쳤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8. 관객 반응: 성공과 논란
- 개봉 첫날 33만 명 돌파, 박스오피스 1위.
- 그러나 평점은 극명하게 갈림. “블랙 코미디의 걸작” vs. “실업의 고통을 웃음거리로 만든 불편한 영화.”
- 해외 언론은 긍정적, 국내 평가는 분열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원작 vs. 프랑스판 vs. 한국판
항목 | 원작 『액스』(1997) | 프랑스판(2005) | 한국판(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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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 버크, 미국 중년 관리자 | 브뤼노, 프랑스 직장인 | 유만수, 한국 중산층 가장 |
테마 | 개인주의 붕괴, 냉소적 풍자 | 신자유주의/아웃소싱 풍자 | 가족·체면·중산층 생존 |
시점 | 1인칭 독백 | 3인칭 관찰 | 다중 시점(가족 포함) |
결말 | 아이러니한 비극 | 냉혹한 단죄 | 희망 여운 가미 |
특이점 | 내면 독백 풍자 | 글로벌화 비판 | AI·알고리즘 경쟁 암시 |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 현실 비판: 공감의 이면, 불편한 희화화
‘어쩔수가없다’는 한국 정서를 잘 반영한 면이 많다. 가장의 무거운 책임감(집 사수, 자녀 교육), 취업 면접의 굴욕, 외국 자본의 침투 등은 IMF 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며, 관객의 공감을 유발한다. 박찬욱 감독 스스로 “중산층 내 전쟁의 처절함”을 강조하며, ‘기생충’과 달리 “동일 계급의 배신”을 통해 한국의 ‘내면적 갈등’ – 체면과 생존 사이의 딜레마 – 를 포착한다.
그러나 한국 정서와 ‘맞지 않는’ 현실을 드러내는 지점도 적지 않다. 첫째, 블랙 코미디의 과도한 유머가 실업의 고통을 희화화한다. 원작의 냉소가 영화에서는 “웃겨도 되는가?”라는 불편함을 유발 – 예를 들어, 살인 장면의 코믹한 편집이 한국의 보수적 가족관(가족을 위해 범죄 정당화)과 충돌한다. 개봉 첫날 평점 하락(극명한 호불호)처럼, 현실의 취업난을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태도가 한국의 ‘공감 과잉’ 정서 – 고통을 공유해야 한다는 무거움 – 와 어긋난다.
둘째, 가족 중심 서사가 오히려 왜곡을 초래한다. 한국 정서에서 ‘가장’은 희생의 상징이지만, 영화는 이를 ‘극단적 폭력’으로 연결지어 윤리적 딜레마를 가볍게 다룬다. 미리의 역할이 ‘지지자’로 한정되며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을 약화시키는 점도 문제 – 원작의 성중립적 시각이 한국의 가부장제 잔재를 증폭한다. 이는 “천원도 아까웠다”는 혹평처럼, 공감을 기대한 관객에게 “현실을 너무 가볍게 비틀었다”는 배신감을 준다. 결국, 영화는 한국 정서를 ‘이용’하지만, 그 불편함을 직시하지 않아 원작의 보편성을 잃는다.
결론적으로, ‘어쩔수가없다’는 원작의 뼈대를 한국 현실로 입히며 신선함을 주지만, 문화적 적응의 과정에서 테마의 깊이와 정서적 무게를 희생했다. 이는 박찬욱의 야심찬 시도이지만, 한국 관객에게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을 남긴다. 영화가 아쉽다면 원작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