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산업재해 사망률 OECD 최상위권’이라는 부끄러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5시간마다 노동자 1명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으며 ,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영책임자 처벌을 강화한 중대재해처벌법(SAPA)까지 시행했다. 하지만 법 시행 이후에도 사망률은 0.4~0.5명(근로자 1만 명당) 수준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고 있다. 처벌 강화라는 강력한 처방에도 왜 현장은 바뀌지 않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처벌 위주의 사후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며, 이제는 예방과 참여 중심의 시스템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숫자가 드러낸 현실: 땜질식 처방의 한계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한국의 사고사망만인율(근로자 1만 명당 사고사망자 수)은 0.43명으로, OECD 평균인 0.29명을 크게 웃돈다. OECD 38개국 중 34위라는 최하위권 성적표다. 특히 안전 선진국으로 꼽히는 영국(10만 명당 0.61명), 독일(10만 명당 0.55명)과 비교하면 한국(10만 명당 4.3명)의 사망률은 7~8배나 높다.
더 큰 문제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숨겨진 재해’다. 한국은 사망사고율은 높지만, 비치명적 재해율은 유럽연합(EU) 국가들보다 현저히 낮다. 이는 기업들이 처벌과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사고를 은폐하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결국 사망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발생해야만 문제가 드러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위험의 외주화: 중소기업·건설현장에 집중된 비극
사망사고는 특정 영역에 집중된다. 전체 사망자의 80.9%가 50인 미만 중소기업에서 발생한다. 이들 사업장은 체계적인 안전관리 시스템을 갖출 여력이 부족하고, 중대재해처벌법 적용마저 유예되는 경우가 많다.
산업별로는 건설업이 단연 위험하다. 전체 산재 사망자의 절반가량이 건설 현장에서 나오며 , 추락, 깔림 등 전형적인 후진국형 재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고령 노동자, 하청 및 임시직, 이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도 심각하다. 이는 대기업(원청)이 위험한 작업을 중소기업(하청)에 떠넘기고, 그 위험을 다시 가장 취약한 노동자들이 감당하는 한국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해외 선진국은 어떻게? ‘참여’와 ‘인센티브’가 핵심
그렇다면 안전 선진국들은 어떻게 낮은 사망률을 유지할까? 비결은 처벌이 아닌 ‘자율적 예방 시스템’에 있다.
영국 모델: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다 영국은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한(reasonably practicable)’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포괄적인 의무를 기업에 부여한다. 핵심은 법적 권한을 가진 ‘노조 안전대표(Union Safety Representative)’ 제도다. 노조가 임명한 안전대표는 작업장을 점검하고, 잠재적 위험을 조사하며, 경영진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의할 권리를 갖는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노동자가 안전 문제의 주체로 참여하면서 실질적인 예방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독일 모델: 예방이 곧 이익이 되는 시스템 독일은 ‘직업조합(Berufsgenossenschaften, BG)’이라는 독특한 산재보험조합을 통해 산업안전을 관리한다. 100% 사용자 부담 보험료로 운영되는 BG는 예방-재활-보상을 통합적으로 관리한다. 가장 큰 특징은 각 기업의 재해 발생률과 위험 수준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부과하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안전에 투자해 사고를 줄이는 것이 곧 보험료 절감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경제적 인센티브가 된다. 이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 대응이 아닌, 비용 절감을 위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예방 활동을 유도하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안전 문화’ 없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법과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안전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안전 수칙을 무시하는 경영진의 태도와 ‘빨리빨리’를 중시하는 현장 분위기는 한국의 부정적인 안전 풍토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독일 건설업 직업조합(BG BAU)의 ‘바우슈타이네(Bausteine)’ 프로그램은 좋은 본보기다. 복잡한 법규를 그림 중심의 이해하기 쉬운 모듈형 자료로 만들어 현장에 보급함으로써, 모든 구성원이 위험을 인지하고 예방에 동참하는 문화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이는 규제 기관이 단순한 감독자를 넘어, 현장에서 작동하는 실용적인 지식과 도구를 제공하는 ‘문화 조성의 파트너’가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처벌을 넘어 예방과 파트너십으로
한국의 높은 산재 사망률은 시스템의 실패다. 처벌 위주의 접근은 사고 은폐와 책임 회피라는 부작용만 낳으며 한계에 부딪혔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영국처럼 노동자 대표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해 현장 중심의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독일처럼 산재보험료와 안전 성과를 연동해 기업의 자발적 투자를 유도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또한, 정부와 안전보건공단은 규제와 처벌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역량을 강화하고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안전 문화를 조성하는 지원자이자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일터의 안전은 비용이 아니라, 생산성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핵심 투자다. 모든 노동자가 안심하고 일하며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과제다.